미술

더 스테일과 함꼐 등장한 신조형주의

하마-- 2021. 11. 27. 09:23

신조형주의의 역사

초기 역사

인상주의의 혁명적인 회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뒤따른 새로운 미술 운동들이 계속하여 나타난 이후 입체파가 20세기 초반에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새로운 조류로 떠올랐다. 네덜란드에서도 역시 이 새로운 미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예술가들은 1914년 이후 네덜란드를 떠날 수 없었고 국제적인 미술 세계(특히 당시 예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와 고립되었고 이 시기 동안 화가인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잡지를 창간하고 새로운 미술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 다른 예술가들을 찾아다녔다. 판 두스뷔르흐는 작가 시인 비평가이기도 한데 독립된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것보다 예술에 대해 저술하는 것에서 더욱 성공한 인물이었고 그의 화려한 개인성과 외향적인 성격 때문에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익숙했던 그는 미술 세계에서 유용한 넓은 인맥을 갖고 있었다.

 

잡지 『더 스테일』의 창간

1915년경 판 두스뷔르흐는 결국은 더 스테일 잡지의 동인이 될 예술가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그는 처음에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박물관(Stedelijk museum 시립 박물관)에서 피트 몬드리안을 만났다. 몬드리안은 1912년 파리로 이주했는데(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Mondriaan에서 Mondrian으로 바꾼다.) 마침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파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라렌(Laren)에 있는 예술가 공동체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그는 바르트 판 데르 레크와 스훈마케르스(M.H.J. Schoenmaekers)를 만나게 되고 1915년 스훈마케르스는 《세계의 새로운 이미지》(Het nieuwe wereldbeeld)를 출판하고 뒤이어 1916년 《조형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Plastic Mathematics)를 출판하며 이 두 개의 저작은 몬드리안과 다른 더 스테일의 구성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판 두스뷔르흐는 야코뷔스 아우트와 헝가리 예술가인 빌모스 후사르도 알고 있었다. 1917년 이 예술가들의 모임은 시인인 안토니 콕(Anthony Kok)과 함께 더 스테일을 창간하며 젊은 건축가인 헤리트 리트펠트는 1918년에 이 모임에 가입하며 비록 예술적 견해의 차이로 판 데르 레크가 1918년 탈퇴하기는 했지만 처음 몇 년간 이 모임은 상대적으로 균질적이었고 매니페스토(선언문)들이 출판되었고 모든 구성원들이 서명을 했고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은 그들의 이론에 중요한 원천을 형성했고 그들의 건축에 대한 발상은 헨드릭 페트뤼스 베를라 허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서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Nieuwe Beelding(신조형주의)이라는 명칭은 1917년 몬드리안이 처음 만들어낸 단어로 그는 더 스테일 잡지에 De Nieuwe Beelding in de schilderkunst(회화에서의 신조형주의)라는 12개의 기사들을 써낸 인물이며 1920년 그는 Le Neo-Plasticisme(신조형주의)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1920년 이후

1921년경 이 모임의 성격은 변하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판 두스뷔르흐의 바우하우스와의 공조와 다른 데서 온 영향들이 역할을 시작했고 이러한 영향들은 말레비치와 러시아 구성주의에서 온 것인데 모든 구성원들이 동의한 것은 아니다. 1924년 몬드리안은 판 두스뷔르흐가 사선이 수평선이나 수직선에 비해 더욱 생명력이 있다는 요소 주의(elementarism) 이론을 제안한 뒤에 모임에서 탈퇴했고 게다가 더 스테일 모임은 많은 구성원들을 받아들였으며 본 세트(I.K. Bonset)의 시와 알도 카미니(Aldo Camini)의 반(反) 철학(antiphilosophy)과 같은 다다이즘의 영향들 역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판 두스뷔르흐가 죽자마자 본 세트와 카미니는 그의 가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판 두스뷔르흐의 죽음 이후

테오 판 두스뷔르흐는 1931년 다보스에서 사망했고 그의 부인인 넬리가 그의 유산을 관리했고 판 두스뷔르흐가 더 스테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그의 사망 이후 이 모임은 더이상 생존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구성원들은 연락을 계속 취했으나 더 스테일은 강력한 중심인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스테일을 밀접하게 조직된 예술가들의 모임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며 더 스테일의 구성원들은 다른 구성원들을 알고는 있었으나 대부분의 정보 교환은 편지를 통해 이뤄졌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과 리트펠트는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1931년 이후에도 이 운동의 기본 개념을 고수하였고 예를 들어 몬드리안은 그가 1920년경 창시한 양식에 따라 작업을 계속한 반면 리트펠트는 더 스테일의 원리에 따라 계속하여 가구를 디자인했고 그에 비해 판 데르 레크는 더 스테일을 탈퇴한 이후에 원래의 상징적인 구성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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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미친 영향

리트펠트가 설계한 슈뢰더 주택(Schröderhuis). 신조형주의 원리에 따라 완공된 유일한 건물이며 건축에 신조형주의가 끼친 영향은 1931년 이후에도 오랫동안 중요하게 남아있었다.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신조형주의의 개념을 지지한 주요 인물이며 1923년에서 1924년 사이 리트펠트는 슈뢰더 주택을 설계했는데 신조형주의의 원리에 따라 완공된 유일한 건물이며 신조형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예인 야코뷔스 아우트의 건물들은 로테르담(카페 드 위니(Café De Unie))과 훅 판 홀란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

더 스테일 구성원들의 작품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지만 신조형주의를 주제로 한 전시들은 정기적으로 조직되고 있고 신조형주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으로는 헤이그 시립박물관 (Gemeentemuseum 더 스테일 관련 작품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몬드리안 콜렉션을컬렉션을 소유하고 있음.)과 암스테르담 시립박물관(Stedelijk Museum 리트펠트와 판 두스뷔르흐의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음]]이 있고 위트레흐트의 센트랄 박물관(Centraal Museum)은 세계에서 가장 큰 리트펠트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데 슈뢰더 주택을 포함하여 이 집 옆에 있는 쇼 하우스(how house)와 슈뢰더 주택에 관한 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다.

 

참고문헌 : 조은정(2017). 한국에서 서양미술사 개론서 쓰기. 한국예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