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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피렌체 시대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 바 가의 성모> 등이 있고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제1 밀라노 시대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고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고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고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고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다.
제2 피렌체 시대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고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다.
제2 밀라노 시대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른다.
앙부아즈 시대
3년간의 로마 체류
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간 피렌체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해전인 1512년 9월에 교황 율리오 2세의 도움을 받은 메디치 가문이 공화정 정부를 와해시키고 가문의 통치권을 회복한 상태였으며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는 줄리아노 데 메디치(1479~1516)가 맡았고 그의 형인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새로운 교황(레오 10세)으로 선출되어 로마에 있었다. 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 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고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후원자 물색
1515년 1월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는 그해 9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밀라노를 점령하였고 이후 7년 넘게 지속되어온 캉브레 동맹전쟁(1508~1516)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교황을 만나려고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했고 같은 해 12월 19일 종전 협약을 위해 교황 레오 10세와 회동한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났다. 선왕 루이 12세를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 1세는 그곳에서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였다.
프랑스 이주
1516년 3월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사망하였고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인 레오 10세와의 사이가 소원하던차에 후원자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로마에 대한 미련이 사라져 버렸다. 이때 다빈치는 프랑스 이주를 최종적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1516년 여름 제자 프란세스코 멸치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앙부아즈로 향했고 프랑수아 1세는 앙부아즈에서 가까운 클로 뤼세(Clos Lucé)에 저택을 마련해 주었다. 이때 다빈치는 3점의 그림 (모나리자라 조콘다 성 안 나와 성 모자 세례자 요한)을 가져갔는데 프랑스에서 <성 안 나와 성모자>와 <모나리자>를 완성하였고 이때 이미 중풍 때문에 오른팔을 쓸 수 없었으나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며 프랑수아 1세는 가끔 찾아왔고 두 사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다빈치는 왕을 위해 호화로운 연회를 준비하기도 했고 또한 로모 랑탱(Romorantin)에 큰 성을 건축한 후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만들자고 제안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했고 이 시대를 앙부아즈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다빈치는 여러 방면에 대한 오랜 연구를 정리하고 운하도를 설계하였으며 수학 실험과 해부학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사망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증가하였고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듯 유언장을 작성하였고 유언장에서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동성애 상대였던 살라이와 다빈치의 하인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등의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제자인 멸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고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프랑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고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에서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고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의 임종 시 그 자리에 없었다. 유해는 다빈치의 유언에 따라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묘지들이 파묘된 후 모두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고 1570년 프란 세스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심상용(2004). 국내 서양미술사, 서양미술이론 연구 장에 관한 연구. 한국미술이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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