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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도나텔로 《다비드》
15세기 초엽 그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고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하며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고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
공예
15세기 및 16세기의 공예에 있어서 장식과 실용의 구별은 그 제품이 예술품으로서 감상 평가되느냐의 여부에서 결정되고 장식의 분류에는 태피스트리 금은세공의 대부분이 있고 실용의 범주에는 철제품 유리그릇류 및 가구가 있고 요약하면 장식품은 다른 예술 특히 회화나 조각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는 데 대하여 실용품에는 소재의 성질과 목적을 살리기 위하여 의장(意匠)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건축
피렌체 대성당
1401년에 피렌체의 모직물업 조합은 피렌체 대성당의 세례당에 있는 제2의 청동문 제작자를 결정하는 경연대회를 벌였는데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두 작품이 남아 드디어 상은 기베르티에게로 돌아갔다. 무념(無念)의 브루넬 레스코는 1403년경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에 가서 고대 건축과 조각의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하며 1417년 그의 연구 성과는 대성당의 돔형 지붕 설계의 경쟁에 있어서 승자로 결실되었고 대성당의 설계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에 의한 것인데 1336년부터 조토의 손에 맡겨져서 그 서쪽 끝의 유명한 종루가 세워졌으나 둥근 지붕은 미완성이었고 공사는 최정 탑(最頂塔)을 제하고는 1436년에 일단 완성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판테온과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대성당에 유사한 대천개(大天蓋)를 가지고 있으나 뒤의 둘은 건조물의 안정을 위해 필요한 부벽(扶壁)들에 의해 외관(外觀)의 미(美)가 파손되어 있는 데 반하여 브루넬레스키의 방법에서는 건축적 기능이 내면에 숨겨지고 중량을 지탱할 부벽은 시각적 효과를 해치지 않는 석괴(石塊) 중에 묻혀 있어서 형체 미가 기능에서보다 우선하는 르네상스적 특색이 나타나고 있고 대천 개 기초부의 갤러리는 바초 다뇨로 가 1507년에 착공하였으나 평판이 좋지 못하여 완성하지 못하였고 또 1490년 로렌초 메디치에 의하여 파사드(건물의 정면)의 경작 기획에는 40명 이상의 무명 예술가가 응모하였으나 이것도 실현되지 못하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사는 대성당에서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前期), 이른바 콰트로첸토는 1400년대의 예술을 말하는 것이며 베네치아에 있어서 르네상스 건축의 완만한 실현은 카 밴드라 민 칼레르지(1481∼1509)의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이것은 피에트로 롬바르도(1435∼1515)가 설계하였는데 당시 피렌체에는 브루넬레스키와 알베르티에 의하여 고전적 양식이 유행하고 있었으나 여기서는 트레이 서리(곡선 무늬의 장식)가 세로로 구획된 창문 따위에 중세적 전통이 남아 있고 파사드의 벽기둥 형태는 각층마다 다르고 특히 외측 격간(格間)을 테두리 한 벽기둥은 두 개를 나란히 세우기 위하여 파사드 중앙에 3련의 창문이 된 것은 그 후 베네치아 건축의 특징이 되었고 이것이 18세기까지 계속되었고 피렌체와 비교하여 창문은 상당히 넓고 크다. 1509년 루카 파치올리는 《신성 비례론(神聖比例論)》에서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하려는 자는 모두가 건축가를 피렌체에서 데리고 온다고 말하고 있고 고대 건축의 구성 요소나 당시의 건축 평면도를 수록한 《발베리니 사본》이라고 불리는 스케치북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만든 것이다.
독일의 르네상스 건축
독일의 르네상스 건축도 회화와 마찬가지로 독일 본래의 고딕 양식과 새로운 이탈리아 양식의 융합을 보여주고 있고 그러나 전반적인 경향으로서는 새로운 자유도시의 출현 즉 시민계급의 대두와 더불어 그때까지의 종교 건축이 점차로 퇴조하게 되는 데 반하여 성관(城館)이나 시 청사 등 세속적인 건물이 융성하게 되어 갔다.
독일의 회화
독일에 있어서는 이탈리아와 비교하여 고딕 예술의 전통이 뿌리 깊이 박혀 그것이 신시대의 갖가지 경향과 혼합되어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 준다. 먼저 형식 면에서 말하면 고딕의 제단(祭壇) 조각에서 점차로 발전하여 이윽고 독립적인 존재가 된 제단화 형식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대부분은 여닫이 문에 의한 북방 특유의 다층식인 것인데 후술하는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는 그 대표적인 예의 작품이며 또 이들 작품을 주문하거나 기증하는 사람이 일찍이 교회에서나 제후가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 점차로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유복한 시민계급으로 바뀌어졌다는 것도 당시의 새로운 경향의 하나였다.
또 오늘날의 통념에서 보면 회화란 액자에 넣어 이동이 가능한 소위 이젤화를 가리키는 일이 보통인데 이와 같은 회화 형식(단 당시는 판화가 태반을 점유하였다)이 성립한 것도 겨우 그 무렵부터이며 그 이전의 회화는 전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거나 대규모의 벽화 혹은 사본(寫本)을 장식하는 미니어처(細密畵)였으며 따라서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사적(事跡)과 사도 전기에서 그 주제를 구했고 초상화나 풍속화 및 풍경화와 같은 장르는 당시에는 아직도 성립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며 이와 같은 형식면과 내용면에 있어서 중세적인 갖가지 제약에서 해방되어 회화가 근대적 의미에서 자율적인 존재라고 주장하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거기에는 여태까지 없었던 여러 가지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되고 특히 초상화와 풍경화의 분야에서 그 시대의 독일 미술이 유럽 미술 전반에 수행한 기여는 매우 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독일 르네상스의 회화라고 할 때에 그 중핵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뒤러를 중심으로 하여 그와 거의 같은 후대인 크라나흐와 그뤼네발트 조금 후의 홀바인 등의 화가가 있지만 그들 이전에서 신시대로 향하는 길을 준비하였던 약간의 화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따뜻하고 순한 인간미와 고귀한 아름다움에 넘친 성모상을 많이 그렸던 슈테판 로호 나를 비롯한 쾰른 파(派)의 화가들과 네덜란드 회화의 영향 하에 독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현실의 자연에 예리한 관찰의 눈을 돌리고 동시에 고딕적인 평면성을 벗어나 3차원적인 공간 표현에도 훌륭한 솜씨를 보인 바젤의 화가 콘라드 비츠 그리고 조각가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화가로서도 중요한 작품을 남기고 고딕적인 생경함이나 형식주의로부터 보다 자유로이 생생한 사실적 양식으로 향하는 길을 연 미하엘 바흐 또한 화가로서 다른 사람보다 특히 기술면에서나 표현에서도 매우 훌륭한 동판화를 남겨 뒤러의 선구자적 존재가 된 마르틴 숀가우어 등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화가이다.
참고문헌 : 조은정(2017). 한국에서 서양미술사 개론서 쓰기. 한국예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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